TPO.

아직도 선명한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강렬한 순간을 잊어버리기도 힘들었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앉은거랑 별 차이가 없어서 더욱 놀랐다)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은 그는, 원산지도 불명확한 야자수 프린팅 된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위계질서나 복장규정이 딱히 없는 환영회라지만 그걸 본 순간 남자는 꽤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은 사석이니 편하게 말을 놓으라는 너스레도 딱히 위안이 되진 않았다. 업무로 돌아가면 당신은 하늘같은 상사고, 저는 그저 말단 직원일 뿐인데요.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렇게 뻗댈 정도의 대담함은 없었다. 하지만 윗사람의 말을 마냥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런 배려는 없느니만 못하지. 한번 배배꼬인 속은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격식을 차리지 않는 자리라지만, 그래도 공적인 자리의 연장인데.

*

현지인들이 뜨내기 관광객들에게도 떠넘기지 않을 것 같은 프린팅 티셔츠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상사는, 겉보기와 달리 사내에서는 유능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오지에서의 신규 사업의 총괄 책임자로 내려올 리가 없었다. 사장의 신임도 두터운 모양이었다. 본사에서 같이 파견된 사람들의 말로는 그보다 더한 인간도 있었다는 말을 얼핏 듣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적당히 채용된 계약직인 남자가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살인적인 업무량을 모두 쳐내고 정시 칼퇴근을 일삼는 상사를 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더한 인간이 있다는건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거지. 남자는 한숨을 쉬며 모니터를 쳐다봤다. 빈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가 무정했다. 괜한 잔업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퇴근해버린 상사의 빈 책상이 야속했다.

초과근무를 원하는 직장인이 어디있냐고요! ······억지로 남아서 하라는 명령도 아니었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뤄봤자, 내일의 나만 고생스러울 뿐이란걸 잘 알았다. 남자는 울며 겨자먹기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밤이 길었다.

*

상사는 무척 젊었다.

아니, 어리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종종 보이는 행동이나 표정에는 아직 소년의 티가 남아 있었다. 성인 남성치고는 작은 키도 영향이 없지 않았다. (당연히, 상사앞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금기어였다) 거기에 다소 난해한 센스까지······.

상사의 옷차림은 좀처럼 얌전한 법이 없었다. 야자수를 필두로 한 각종 화려한 꽃무니의 하와이안 셔츠나. 알 수 없는 문자와 꽃이 박힌 맨투맨. 가뜩이나 마른 다리가 드러나 보는 사람이 안쓰러워지는 반바지. 너무 많이 찢어져 너널너덜한 청바지도 모자라——최정점은 모든 복장에서 빠지지 않는 낡고 빛바랜 중절모였다. 아무리 격식을 차릴 필요없다지만 TPO정도는 챙겨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직장인데. 무럭무럭 자라나는 의문을 참다못한 남자는 점심시간 등에 슬쩍 동료들에게 운을 띄워보기도 했다.

“저희 간부님은 독특하신 거 같아요. 특히, 의상이······.”

“아, 그거요? 하긴 본지 얼마 안되어서 모르실수도 있죠. 그게 뭐 별거인가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랑 달리 동료의 폭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간부님은 언제든 그 모자를 벗는 날이 없거든요.”

남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가능한가요?”

“간부님이니까요?”

이상할 것도 없죠.

오늘의 날씨는 맑음, 같은 태연한 대꾸에 지적한 사람이 외려 벙쪘다. 젊고 (작은) 상사는 이상하리만치 부하들의 충성도가 높았다. 이미 콩깍지가 씌인 탓인지 지극히 당연한 남자의 지적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모두가 이상하면, 이상하지 않은 한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법이다.

깊게 생각할수록 손해임을 깨달은 남자는 그 날 이후 이 문제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는데, 보이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옷은 매일 바뀌기라도 하지만··· 모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사의 머리위를 지켰다. 같은 모자를 10개쯤 만들어놓고 하루하루 갈아쓰고 세탁하며 관리하는 걸까. 그보다 저 모자는 뭐길래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까. 어쩌면 보이는 곳만 멀쩡하고, 모자로 가린 부위는 아주 심한 원형탈모인지도 몰라···. ——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상상하고 만 남자는 순간 목에 사레가 들렸다. 동시에, 모르기 전보다도 더 유심히 상사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다. 심하게 기침을 해대느라 생리적인 눈물까지 흘리고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정말 그런거라면, 젊은 나이에 참 안됐어.

전혀 이상한 결론으로 혼자 납득하고 만다.

—이걸로, 이야기가 끝이었다면 좋았을텐데.

*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을 치하하는 의미로 마련된 행사장의 입식 파티였다. 어디까지나 상사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들었으므로, 남자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편한’복장을 생각했다.

이런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 놀란 남자는 쥐고 있던 집게를 툭 떨어뜨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양념이 하얀 테이블보에 얼룩을 남겼다.

그러니까, 정장이었다.

완전한 풀오더는 아니었으나 빳빳하게 칼라를 세운 와이셔츠. 크로스의 검은 스톡 타이에 잘빠진 허리 라인을 강조한 베스트를 돋보이게 하는 볼레로가 인상적이었다. 어깨에 살짝 걸친 검은 롱코트가 가볍게 펄럭인다.

평소의, 그저 까불대는 소년같은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나, 외꺼풀에 가는 눈썹이 한층 더 사나운 인상을 강조한다. 흰자가 도드라지는 삼백안에 짙은 다갈색 눈동자는 얼핏 보면 검은 색이라 착각하기 좋을 정도다. 베일 듯 첨예한 분위기에 작은 체구에도 숨길 수 없는 위압감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뭐냐, 그 바보같은 표정은.”

시비조의 껄렁한 말투까지. 완벽하게, 마피아의 그것이었다.

“······아뇨. 워낙 잘 어울리셔서.”

오늘만큼은 진심이었으나 아부라고 생각한 상사는 피식 웃었다.

“가끔은 예의를 갖춰야지.”

손을 감싼 비로드 장갑이 살짝 움직여 모자를 바로했다. 오늘같은 날도 빠지지 않는구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단 하나 다른 점이라면. 빛이 바랜 그 색마저도 마치 이날을 위한 설계였던 것처럼 위화감 없이 어울린다는 점이다.

“······제가 졌네요.”

“? 무슨 소리냐.”

“아뇨——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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